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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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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수기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해요

 저는 저희 어머니에 대해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30년이 다되도록 「간질」이라는 병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머니 어릴 적에는 외갓집이 좋은 형편이 못되어서 제대로 학교 한 번 못가서 지금도 한 번씩 ‘교복 입은 학생들이 부럽다’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타지방으로 일을 다니시다가 좋지 못한 일로 외갓집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피곤했는지 오는 기차 안에서 잠이 들었나봐요. 그러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다왔다고 말하며 저희 어머니를 깨워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아직 잠이 덜깨어 기차가 정차했다가 출발하는지도 모르고 비몽사몽에 기차에서 내리다가 그만 사고가 났는데 사고가 나면서 머리쪽을 크게 다치셨습니다. 그때 너무 많은 피를 흘렀고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 뇌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을 받고 결혼을 하고 언니와 저를 낳아 주셨지만 어머니의 병은 수술로 끝난 것이 아니였습니다. 신혼 때도 시도때도 없이 발작이 있었고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먹고 살기 바빠 어디 병원, 어떤 약이 있는지 뭐가 있는지 모른체 지내다가 동네 주민분의 도움으로 부산어디 병원에 가면 된다고 하더라 말을 듣고 가서 제가 중 ? 고등학교 때 까지 부산에 있는 병원에 다니면서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약을 먹으면서 크게 발작이 없고 정상으로 생활을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제가 중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잘 지내곤 했습니다. 텅빈 집에 엄마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 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그런 생각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못했습니다.
어떨 때 보면 어머니는 그 사람들에게 심부름꾼 같았고 술먹고 화풀이 대상도 우리 어머니였고 가져가지도 않았는데 이웃집에 한번 놀러 갔다가 온 것 뿐인데.. 이웃집에서 와서 반지 훔쳐갔다며 어머니를 때리고 그것까지 안되어서 우리 아버지 멱살까지 잡으며 싸웠습니다. 결국 그 반지는 다른 곳에서 찾았고 도박은 한것도 아니고 그저 옆에서 심부름 했는데 돈을 가져갔다며, 저를 경찰서에 데려가려고 해서 저는 길거리에서 무릎 굻고 빌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촌동생이랑 언니랑 나랑 셋이서 도서관에 간다고 나갔고 집에는 엄마 혼자뿐이었습니다.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엄마가 방에 누워서 말도 못하고 꼼짝 없이 누워만 있기에 놀라서 가보니 몸에 마비가 되어서 움직이지 못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응급상황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어머니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제가 따뜻한 물이라도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울면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어머니 입에 물을 넣어 드렸지만 그것마저 먹지 못하셨습니다. 언니가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아버지와 연락이 되고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들것에 실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어머니는 환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 듣기론 어머니가 청소하다가 손부터 마비가 오기 시작해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신으로 몸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을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저희 어머니를 그저 환자가 아닌 걱정의 눈빛도 아닌 신기하고 구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할 때는 모르척 하던 사람들.. 구급차가 오고 들것에 실려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신기한 듯 구경하는 사람들 .. 그리고 나서도 걱정하는 사람 없고 더 어머니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때 어린 저는 속상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제가 어릴 때 친구가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잘 놀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집에 오자마자 발작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 본 친구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었고 저도 숨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가 하는 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네 엄마 왜 저래?”어떻게 보면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낄 수 있는데.. 그 때 어린 나로서는 그 말이 너무 가슴아팠고 아픈 어머니를 챙기는 것보다는 같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왜 우리 엄마는 저러는 건지.. 왜 아픈지.. 다른 엄마들처럼 그렇게 해주면 안되는 것인지”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발작이 끝나고 집에 계속 있었음 괜찮을텐데.. 발작이 끝나자 마자 정신도 돌아오지 않은채 밖으로 나가버렸고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숨고 있던 나에게 아주머니 한 분이 따라가 보라고 해서 나갔지만 어머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그렇게 얼마나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어머니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달려가 어머니를 잡았는데 어머니는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평소에 알던 어머니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우리 어머니 옷을 입고 있는 듯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지금 사는 곳이 우리집이 아니라고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는 어머니를 어린 제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고 다행이 주변 아주머니 도움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수많은 시간동안  저희 어머니와 우리 가족 모두 지쳐 갈 때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거나 가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언제나 가족들이 모여도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쇼파에 앉아 있고 누구하나 곁에 가는 사람 없이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여도 외톨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저는 학생이라 공부에 신경쓰고 있었고 아버지는 먹고 살려고 일하러 다니고 솔직히 어머니에게 신경쓰지도 못했습니다. 또 내가 20살이 되고 나서도 정확한 어머니의 병명조차 몰랐고 그저 저는 ‘우리 엄마는 늘 아프구나’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데..
언니와 같이 출근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니와 저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렇게 입원한지 만 하루도 지나지 못해 언니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퇴원을 해 줄수 없다 해서 외출이라도 하고 오겠다 해도 안된다 치료해야 한다 했지만 응급실에 누워 있을 어머니 생각에 계속 어떤 일이 있으면 다 책임지겠다 각서를 병원측에 내고 언니랑 함께 어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로 갔을 때는 어머니가 의식이 없었고 병원에서 이야기 해주는 것을 들었는데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택시 안에서 갑자기 발작을 했고 택시 기사가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 왔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ct를 찍고 혈압이 너무 높아서 혈압을 낮추는 약을 먹었다 ct상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근데 언제부터 저렇게 했었나.. 말하시며 물어보시기에..
오래 전 기차사고가 있었고 그 이후로 뇌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부산 무슨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말씀을 드리고 진정이 된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정신이 조금 드는지 집에 가자 했고 병원에서 집에 가도 된다 해서 약을 처방 받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근데 다시 택시 안에서 어머니가 발작을 했고 급하게 다시 응급실로 찾았습니다. 근데 처음보다 발작을 더 심하게 했고 결국은 입원을 해야 한다 했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으로는 이런 분들은 절대 혼자서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어디 나갔다가 발작을 했는데 혹시나 어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거나 밖은 정상인도 위험한데 이런 분들이 혼자서 다니다 발작을 하게 되면 더 위험하다. 그런 말을 듣고 입원을 며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존에 먹던 약을 바꾸고 새로운 약을 먹었는데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지 퇴원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발작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손발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나중에는 구토까지 하시고 발작중에는 대소변조차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눈이 뒤집히며 발작을 하는데... 그 순간 저랑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때 너무 가슴 아프면서도 솔직히 무섭기도 하여 어머니 눈에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발작과 함께 눈이 뒤집히는데... 정말 지켜 보는 내가 봐도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지옥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 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 눈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는 다시 입원을 했고 발작이 너무 심해 만 하루동안 혼수상태였고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 하루가 너무 길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캄캄 했습니다. 퇴근 후 어머니에게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힘겹게 산소호흡기를 의지 하고 있었고 잠시 깨어나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아픈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지 몰랐습니다. 밤새 며칠을 간호하면서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바꿀 수만 있다면 좋겠다 수백 수천 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대신 아파줄 수도 없었고 그렇게 발작을 해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오로지 그 발작이 멈추길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행이 그 다음날 어머니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의사선생님과 상담할 때 발작이 5분이상 지속이 되면 뇌에 산소 공급이 안되어서 위험한 상황이다 잘못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이 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제야 인터넷으로 책으로 약을 바꾸기 전 어머니의 약 정보를 찾아보면서 어머니의 병이 간질인 것도 알았고 발작을 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또 옆에서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알게 되고 환자 본인도 중요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도 이 병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고 어떻게 해 주는 것이 환자나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조금은 덜 아프게 덜 불편하게 최대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 깨닫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전처럼 심하게 대발작은 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약을 먹고 신경계쪽 약을 먹으면 그쪽으로 신경이 많이 없어진다 하고 워낙 어머니께서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몸이 약해서 기타 필요한 영양제를 먹으며 틈틈이 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때 보다는 아직까지는 대발작을 하지 않고 가볍게 잠시 멍하거나 좀 컨디션이 안좋으면 입술이 파랗게 되면서 손을 만지작거리는 정도입니다. 깨끗하게 나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저와 우리 가족은 이것만으로도 큰 발전이기에 더는 욕심 없이 이것으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어머니 혼자 가까운 슈퍼라도 나가는게 불안하기는 하지만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께서 가족이 옆에 있을 때 함께 있을 수 있을 때 혼자 조금이라도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드리며 한 번씩 가족과 교외로 놀러가곤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전과 다르지 않는 똑같은 상황에 지치는 것도 있지만, 서로 부족한 것은 채워 주며 단 1%라도 어머니가 다른 날 보다 건강하고 언제나 웃으며 지낼 수 있도록 저와 남은 가족들은 약속하며 오늘도 서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갑자기 대발작을 해서 늦은 밤 언니 차로 응급실로 향하는 길.. 어머니 정신이 혼미하면서도 저의 손을 꼬옥 맞잡고서 내가 "엄마랑 잡은 손 놓고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겨내자 엄마?”라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힘겹게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셨습니다. 그 때 그 마음 그 느낌 그 사랑 잊지 않고 서로 위하며 생각하는 가족들 마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와 같은 분들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내일이면 조금 더 나아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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