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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수기

기회를 한번만 주면

어떻게 저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고등학교를 들어갔을 때 쯤부터 간질이라는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본론에 먼저 저는 아프기전 저의 체격은 키183cm, 몸무게 75Kg의 아주 좋은 몸을 가진 청소년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 했기에 저는 학교 생활이든 모든 생활이 활기가 넘치고 주위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집안 사정으로 집을 떠나 타지역 공업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고2때 학교 선배들의 집단 폭행으로 머리를 맞았는데 그게 잘못된 것인지 그 일이 있은지 몇 일 후 기숙사에서 자고 일어나니 룸메이트 친구의 말이 제가 잠꼬대가 너무 심하면서 몸부림까지도 심하게 하더라고 말하기에 저는 그 날 피곤 했나보다라고만 하고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주말이라서 집에 왔다가 월요일 아침 첫 차로 학교를 갈려고 집에서 잤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에 제가 누워있는 거였습니다. 부모님들의 표정은 아주 많이 굳어 있었습니다.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께서는 회사에 들어가시고 저는 병원에서 마련해준 구급차에 실려 마산 삼성병원에서 M.R.I , CT 검사 등을 받고 난 후 학교로 왔는데 결과를 보니 의사선생님 말씀이 왼쪽뇌가 문제가 보인다며 혹 머리에 충격 받은 적 있는지 물어 보셨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앞에 일들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서 약을 타 먹었으나 아무런 진전은 없고, 학교 안에서는 실습 중에도 수업 중에도 기숙사 생활에서도 계속 쓰러지고 하니 눈을 뜨면 학교 옆 병원 응급실.. 정말 괴로웠습니다. 학우들이 제 뒤에 두명 이상만 있어도 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 정말 힘들었는네, 학교에서는 제가 타 학생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휴학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업 성적은 당연히 잘 나올 수도 없었죠. 중간고사를 치면 기말고사는 포기하고, 친구들 시험 공부할 때 저는 대학생들과 같이 6월말쯤에 집에 내려가고 2학기 때는 기숙사에서도 사생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강제 퇴사를 당하고, 잘 곳이 없어 자취하는 친구들 방을 떠돌며 학교 생활을 했었는데, 그런 사실은 물론 부모님들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죠. 집 형편에 저 혼자 자취는 힘들고 하숙시킬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걸 잘 알기에 말씀드리지 못했죠 그러다 어머니께서 담임선생님과 통화중에 제가 혼자 떠돈다는 사실을 아시고 난 후 이종사촌형이 그때쯤 근교 대학을 다니며 자취를 하고 있어 학교와는 먼 거리지만 사촌형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 첫차를 타면 정확하게 등교시간에 교문을 통과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한 학년을 마치고 3학년 때는 평소 저를 좋게 보시던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다시 기숙사생활을 하며 기숙사 사생장, 학교에서는 학생회 간부 등을 하며 저는 저 나름 되로 용기를 가지며 하교를 다녔으나, 고3이다 보니 진학문제에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저의 전공인 설계파트인 회사로 취업을 했었죠. 다행히 회사가 집 근처라서 문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 문제는 제가 아픈거 때문에 컴퓨터를 오래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CAD를 하기에 컴퓨터가 필수이기에 저는 현장 일도 사무직도 어느 것도 저를 받아 주지 안아 젊은 혈기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약 때문인지 먹지도 않은데도 살은 계속 찌고 몸은 더 안 좋아지고 주위 친한 친구 부모님들도 제가 가는 걸 못 마땅해 하시고 저는 점점 혼자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한 2~3년을 바깥 출입을 안할 정도 세상이 무섭기만 했습니다. 저는 군대를 정말 가고 싶었는데 면제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말 보다 대한의 건아답게 군 의무를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군대를 안가고 있던 이시기에 저는 혼자 소외되었다는 것에 깊이 빠져들어 혼자 자살 할려는 생각도 수차례 하면서도 바닷물에 몸을 던져 숨이 차오르는 와중에 떠 오르는 어머니께서 저 간호하신다고 잠 못 이루시며 고생하시던 모습이 생각이나 죽을 용기로 다시 살아 봐야지 하며 자살 하려든 마음을 고쳐 먹었든 적도 있습니다. 정신병원에도 강제로 실려가 입원 당한적, 정신을 잃고 4일만에 깨어난적, 하루에 10번 이상을 간질 발작 증상 보여 몇날 몇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먹을 걸 주시는 부모님께 어린아이처럼 투정에 신경질만 내고 정신병원에서는 태어나서 보지도 않은 성경책을 보지도 않고 외워 되는 걸보고 주위 사람들이 놀라기까지 하고, 나의 눈앞에 누군가 보이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집안에 누구라면서 몇 시간 전에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오고 했습니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건지 그때는 정말 내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왜 하필 이런 병일까? 왜 하필 나에게... 점점 힘들었습니다.

20년을 살던 곳에서 떠나 다른 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 내 나이 25살 내가 집에만 있는 걸 본 사촌형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 형이 나에게 사회복지 일을 해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문대 사회 복지과에 진학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고통을 알기에 그 고통에 대해 더 열심히 봉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난 그래도 운동을 해서 어느 정상인들보다도 힘을 쓸 수 있고 양손 양다리가 있어 장애인들의 튼튼한 손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뒷 늦게 진학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냉정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처럼 한 학기 두 번의 시험 중 한번의 시험으로 평점을 내다보니 학점은 별 볼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회 복지과라면 내가 간질 발작으로 쓰러져도 뭔가 틀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에게도 소외당하고 교수들도 제가 이렇다해서 여러 가지 학교생활에 있어 과대를 한다든지 뭔가를 하게 되면 저에게 다른 학생들에게 이야기하여 모든 혜택을 박탈했었죠. 한번은 학교 안 강당에서 다른 간질 발작하는 학생을 보고는 사회복지과 교수는 구경만 하고 오히려 저와 다른과 학생들이 도와 줘서 그 학생을 보살펴 줄수 있었는데 그 쓸어진 학생이 저희 사회복지과 학생이라는 것이 저는 더 화가 났습니다. 그 교수님에게.... 평소 강의 때 모습과는 틀렸으니깐요! 하여간 무사히 이론면에서는 힘들었지만 실습등을 열심히 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증 뿐아니라 여러 자격증을 가지고 졸업을 하면서 취업을 할려고 하니 저에게 최고의 문제가 생겨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될려면 특히 남자 사회복지사는 운전면허증이 필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질환자는 면허증을 취득 할 수 없기에 취업도 못하고 나이는 먹어가고 그래도 마음만큼은 변하지 말자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봉사활동이 필요한곳이 있으면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고 하니 몇 군데 시설장들께서 신경을 써 주시고 하여 복지관에서 무료 치료 체육관등에서 무료로 운동을 하고 하여 몸무게가120Kg가 넘든 몸무게는 약20Kg정도가 빠지고 지금은 면허증도 취득하여 주위 분들이 도와 주실려고 애를 많이 쓰시고 병원에서도 제가 노력 얼마나 노력하고 눈물 흘렸는지 아시기에 주위 복지 시설에 추천도 해 주시고 또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신 초,중,고 선생님들께서도 병원비등을 보내주시며 격려 해 주십니다.

그런데 정말 이글 제목처럼 기회를 한번만 주시면 저의 이몸을 최대한 활용하여 저와 같이 뒤에서 눈물 흘리시는 분들 저의 부모님처럼 남들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든 자식이야기 그러면서 눈물 흘리시고 계시는 여러 부모님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 장애 등급을 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당당히 말합니다. 저는 장애도 아니고 단지 모든 사람이 일년에 한두번 하는 감기와 같고 증상은 밤에 잘 때 하므로 보통 사람들이 잠꼬대하는 거와 같다라고 저도 하루에 10번 심하게는 15번씩 발작하여 부모님 눈물을 흘리게 하였으나 지금은 자신 있게 밖에 나가고 운동도 할 수 있어 사회에 대한 자신이 생깁니다.

아직 취업은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정말 나의 꿈을 활 짝 펼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습니다. 얼마전에는 건강해지기 위해 한여름에는 경호원 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햇볕에 서 있어 보기도 하고 하여간 서서로 아픔을 이겨내서 지금은 어디든 이력서를 낼 수 있게 되어 난 행복합니다. 지금도 눈물 흘리시는 분들 용기를 가지세요. 저의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보다 덩치가 큰 저를 엎고 새벽에 아플 때면 맨발로 시내를 뛰어 다니시고 아파서 몇 일 먹지도 못하면 새벽에 부두에 나가셔서 횟거리를 사오셔서 베란다에서 직접 쑥거리고 앉아 횟거리를 장만해 오셔서 저의 식욕을 찾게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도 못 보시고 작년에 하늘 나라에 가셨으니..... 제가 건강해진 것도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항상 지켜주신 덕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도 용기 잃지 않고 어머니, 동생과 잘 살겠습니다.

송지환 2009.08.24
에필리아에서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암담한 현실이 답답할 뿐입니다. 아홉살난 우리 아들의 삶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고 잘 생활하시어 건강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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